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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노 교수의 선교논단(4)
작성일[2011/02/07 09:44:16]    

예술선교, 21세기 선교의 방향

노윤식  교수 (성결대학교 선교신학)

선교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람들의 문화 속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문화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으로서 그들의 삶의 지혜와 관습의 총체이다. 문화에는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는 방식과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사람들이 질병이나 환난을 당할 때에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그 방식이 다양하다. 그 다양한 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예술을 통하여 치유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삶의 목적과 안전성을 부여하는 종교는 본래 예술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페루의 한 산골마을에서 한 아이가 천연두에 걸려 고열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종교 의식이 치러진다. 사람들이 종교를 집전하는 사제를 중심으로 그 아이 주변에 모인다. 이들에게 천연두는 악한 영의 침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얼굴에 검은 재로 분장을 한다. 좀 더 솜씨가 좋은 사람들은 가면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 주변에서 악령을 달래기 위하여 제물을 바친다. 악령이 만족하고 떠나도록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한참 의식을 치른 후 아이의 열은 내려간다. 이 치유의 과정에서 악령의 존재, 사람들의 두려움, 공동체의 단합 등의 요소가 돋보인다. 실제로 악령의 존재와 질병의 관계가 성경에서도 증언되지만, 그 치유의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춤과 노래, 가면이나 탈의 사용 등의 예술적인 측면이다. 종교에서 예술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선교의 과정에서 선교사가 가는 문화권마다 예술적인 측면을 도외시하거나 그것을 심지어 우상 숭배로 규정하여 제거하였다는 데 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선교학을 가르쳤던 순더마이어 교수는 서구 선교사들이 예술과 문화에 대하여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선교사 교육에 있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고등교육의 부재로 설명하고 있다. 대학에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선교사로 헌신하였을 경우, 이들은 또한 현지 문화와 예술을 우상숭배와 구별할 수 있을 만큼의 신학적 훈련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예술의 종교적 가치를 대학에서 배우지 못했고, 신학교나 선교사 양성기관에서 모든 형상에 대한 부정적인 교육을 받았다.

예술은 종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를 통해서 현지인들에게 ‘마음의 안정감과 치유의 과정’에 깊이 관계되고 있는 예술의 핵심을 그들의 종교에서 제거함으로써, 기독교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서구근대주의와 현대과학주의의 대변자로 인식되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과거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평안함을 선사하며 삶의 기쁨과 활력을 주었던 모든 형상과 그림 그리고 춤과 노래 등을 없애버리는 일과 동일시되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삶을 재미없게 살아야 하는 무미건조한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일반에게 인식되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공동체가 모여서 춤과 노래, 그림과 형상, 음식과 음료를 통하여 같은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가슴 뿌듯한 정감을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동일시되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관리와 금욕 그리고 음료와 음식은 성찬의 상징적인 한모금과 한 입에 불과한 것일 뿐으로 제한한다는 것으로 여겨졌다. 

필자는 종교 개혁의 본산지인 독일 루터 교회의 성례전에 참여하면서 제단 중심의 십자가 신학이 그 중심에 있음을 보았다. 개신교는 말씀 중심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독일 교회의 중심은 제단이었고, 그 제단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었다. 교회마다 지역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달랐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모습을 부각시켜 그린 곳, 철제로 검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매달림을 형상화 시켜 놓은 곳, 아예 실물의 10배 정도로 크게 청동으로 만들어 그 거대한 형상을 제단 전면에 걸어놓은 곳,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에서 눈 코 입보다는 흰 색과 검은 색으로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곳 등 다양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형상은 사람들에게 성례전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겸허한 자세를 갖게 만든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기 전에 서서 경건하게 고개 숙여 기도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교회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는 엄숙하고 경건한 자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필자가 동유럽 폴란드 바르샤바 한인교회에서 오전 예배 집례를 마치고, 도심의 교회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의 도심에는 중세 이후부터 역사적인 교회들이 수십여 개 모여 있었는데, 모든 교회가 오전 8시 30분부터 약 2시간 간격으로 저녁까지 예배를 드렸다. 각 교회마다 사람들이 가득 가득 모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가히 폴란드에서 교황이 배출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국민의 97%가 로마 가톨릭 교인인 폴란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교회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젊은 부부와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주일 날 교회로 몰려드는 모습은 가히 부러울 정도였다. 교회 내부는 독일 교회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많은 형상과 미술 작품 등을 소장한 그 자체가 예술 작품이었다. 사제는 경건하게 미사를 집례한 후 마이크를 뽑아들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 아이들 예배를 율동을 하면서 진행하였다. 부모들과 아이들이 재미있게 따라하면서 아이들 예배는 활기 있게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종교는 선택이 아님을 강하게느꼈다. 종교는 삶 자체이고, 종교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이 살아나고, 그 종교 속에서 삶을 기꺼이 마감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서유럽이나 동유럽의 교회, 구교나 신교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면모는 모두 예술과 관련된 것이다. 음악에 있어서 파이프 오르간은 성례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하 음악의 정규적인 연주와 예배의 모든 이니시어티브는 음악이 선도하였다. 그리고 교회 건물의 형상들의 웅장함이다. 건물마다 십이사도의 형상이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천정이나 벽에 위치해 있었고, 천사들이 나팔 부는 형상은 제단의 상위 부분과 설교단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나 그림은 구교의 경우 제단 위에 높이 들려 있었다. 제단의 최상위에는 태양이 모두 금색으로 붙어 있었는데, 구교의 경우에 그 안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신교의 경우에 그 안에 삼위일체를 표시하는 삼각형과 점이 있었다.

그러면 선교에 있어서 예술과 우상숭배의 나누는 기준이 어떠한 것인가? 성서에는 분명히 어떠한 형태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출 20:1-6, 신 5:1-21).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 그리고 영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지성소에 모셔진 하나님의 법궤위에 두 세라핌을 만드는 것은 허용되었고, 놋 뱀을 만들어 치유에 사용하는 것도 용인되기도 하였다. 물론 놋 뱀의 신격화와 금송아지의 숭배는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이스라엘 왕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던 최대의 실수는 우상을 만들고 그에게 드린 제사 행위였다. 구약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상 숭배와 약자 억압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교회에서 형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적 표현을 하는 것이 우상 숭배인가? 한국의 교회마다 교회 건물에 스테인 그라스로 성령의 비둘기 상징과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양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설치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극단적 기독교 신종교운동(New Religious Movements)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제단에서 십자가상도 떼어 버려야 하는 것인가? 예술에 대한 선교학적 원칙이 정립되어야 한다.
우선 성경적으로 예술에 대하여 살펴보자.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는 예술 작품이 우상이라고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우상 숭배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절을 하는 것이 우상숭배였다. 그러나 그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정확하게 지적한다(골 3: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도 밝힌다. 그런데 그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다(골 3:3-4).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예술적 표현이 가능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표현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인 예술가가 조소나 그림을 그릴 때에 거기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그 예술 작품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그 생명을 전달하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술의 선교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리스도인들의 창조적 삶의 표현이자 봉사와 선교의 기능을 발휘한다.

보통 예술이나 학문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한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빌 3:8).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는 모든 것을 초등학문으로 여겼고, 그것을 버린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 참여함을 돕는 학문이나 예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있는데, 그것도 오해하면 안 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라는 출애굽기 32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뛰노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상숭배 행위 곧, 음란한 행위, 주를 시험함, 하나님께 대한 불평 등과 연관이 깊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었다(고전 10:8-10). 금송아지는 하나님의 부재를 인간적인 노력으로 메꾸어 보려고 한 이스라엘의 잘못된 행동이었고, 곧 풍요와 다산의 의식으로 먹고 마시며 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할 수 있는 예술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바울은 우상 숭배를 무엇을 만들고 그리며 예술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우상 숭배를 영적인 간음, 하나님을 배반하는 육체의 음행, 속임, 잘못된 정욕 등으로 해석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임을 강조했다(고후 4:4).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표현했다(고후 4:7).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몸에 거하는 하나님의 질그릇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의 성육신 자체가 생명의 나타남이요 예술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생명이 보이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심은 그 자체가 가장 숭고한 예술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선교 도구이다.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말씀했다(고후 4:18). 하나님의 선교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예술 선교야 말로 21세기 선교의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단수정.변조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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